동윤이는 세 형제중 셋째 아들입니다 아들 귀한 집 시집와 아들만 내리 셋을 ..(그것도 직장 생활을 하면서 ) 낳았기에 시댁에서 저는 얼마나 많은 칭찬을 받고 지내왔는 지 모릅니다 나중 눈을 돌려보니 아들셋을 부러워하기보단 불쌍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고 놀랐습니다^^;;; 시대가 아들만 키우기에는 많이 불리한 쪽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도 뒤늦게 알았지요^^ 아이들은 제가 키웠다기 보다 시부모님 손에 의해 키워졌기에 아이들의 어릴적 소소한 재미는 느껴보지 못했습니다 전 정말 남편과 저만 열심히 살면 되는 줄 알고 30대를 치열하게 보냈습니다. 남들은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하지만 저는 혼란스러웠던 20대도... 치열해던 30대 보다도 조금 관망하는 듯할 수있는 지금 ..나이듦이 좋습니다..아니ㅡ 편안하다고 해야 옳겠습니다 큰 아들이 5학년 되고 둘째 아들이 4학년이 되면서 제가 살고 있던 우리나라 시골까지도 조기유학바람이 불었답니다 저는 귀가 얇고 남을 쉽게 믿는 편이라서 뿐만 아니라 어릴 적 공무원 아버지의 6남매중 둘째로 ... 또 어려운 공부를 덜컥 하게 되는 바람에 저의 중학교 시절부터 꿈꿔오던 못이룬 유학에의 꿈을 아들을 통해 이뤄보고자 시골에서 서울로 상경하여 두 녀석을 한꺼번에 메이플릿지 관리형 유학을 보내게 되었답니다 그리고는 짧다면 짧은 1년안에 지금과는 반대로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실체를 파악해보고자 .. 자존심때문에라도 굴복하지ㅡ 않고 극복해보고자 지금 생각하면 엄청난 금전적 손실을 감수하고 엄마의 잘못된 판단과 섣부른 애정으로 손상된 아이들의 치유를 위해 캐나다에 들어갔습니다. 말은 편안하고 안락한 < 안식년 > 이지만 남들에게는 말하기 어려운 유학 실패를 극복하기 위한 마지막 방법이자 우리 가족의 자존심이라고 생각을 했지요. 그리고는 돌아와서도 두 아들들은 조기 유학의 실패에서 겪는 여려 유형의 어려움들을 계속 겪어나갔고 다행스럽게도 주위에서 좋은 선생님들과 좋은 친구들과 좋은 친지들의 보이지 않는 노력으로 하나둘 극복해나가기 시작했어요 이제는 온전히 그 때의 아픔들을 돌아보고 동생에게 충고도 해줄 정도가 되었답니다 이후 저와 남편은 막내 아들은 조기 유학을 보낼 생각은 하지도 않았습니다.. 저의 교육관은 조금 남다릅니다 지금 한국의 교육현실과 너무 달라 매번 갈등을 겪고 있고 뚜렷한 확신도 없습니다. 그래도 천편일률적으로 키우고 싶지는 않았는데 동윤이를 잘 살펴본 결과 언어에 유독 재능이 있어보였습니다 7세 무렵 어머님 친구분이 이사장인 중국학교를 들어가겠다고 스스로 선택했기에 과감히 유치원을 거쳐 화교 학교에 입학을 시켰지요. 길에서 주운 강아지 2마리와 함께 한 학년에 반이 1 개 ..그리고 반학생수가 10명 이내인 시골 화교 학교를 본인이 좋다고 하여 4학년까지 다니게 했습니다 얼마나 행복하 생활이었는 지 가족의 안식년 기간 중에도 학교를 빠질 수 없다하여 캐나다에도 뒤늦게 짧게 합류하였어요 그렇게 초등 4년을 보내고 ..또 본인이 스스로 엄마 , 형들과 함께 시골에서 서울로 또 한국학교로 오고 싶다고 하여 전학을 시켰습니다 그렇게 1년을 한국 학교에 있으면서 우리 부부로서도 새삼 함께 사는게 너무 좋아 유학의 폐단은 둘째치고 보낼 생각을 아예 못했습니다 그러나..형들로 인한 가족들의 마음의 상처가 아물게 되고 유학을 보내도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즈음에 이제 겨우 한국 학교에서 1 년째 적응을 할 무렵인 5학년 10월에 저의 모임에 따라 간 동윤이가 오샘과 지낸 지 몇 시간만에 가게 해달라고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이미 아.픔.을 겪은 곳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그래서 제가 OSS 에 아이를 보내고 얻은 것은 < 극복 > 입니다. 가족의 아픔이 있기에 마냥 즐겁지만은 않은 곳이었지만 이제는 제 2의 고향이라 생각됩니다 이제 저희 가족은 동영상으로 옛날을 회상시키는 모든 곳을 보여주어도 다들 껄껄 웃을 수 있지요. 그것이 동윤이를 통해서 본 .. 또 OSS 이기에 가능했던 ..< 치료 > 입니다 ***라면 때문에 별 이야기를 다썼습니다 다소 감상적으로 보이는 글인지라 망설임없지 않지만 이런 실패했던 이야기도 있었고 잘극복해나가고 있구나 스스로 잊지 않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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